1. 멀린은 눈을 몇 번 깜박였다. 그러나 책상 위에 놓인 수상쩍은 박스는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부드러운 광택이 나는 진주빛 리본과 분홍색과 하늘색이 교차된 스트라이프 무늬의 상자 겉면에는 <HAPPY DONUTS>이라고 쓰여 있었다. 킹스맨 본부와는 썩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물건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랜슬롯이 돌아온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제임스가 브라질로 떠난 지는 아직 3일도 안 지났기 때문에 그 가능성은 상당히 낮았다. 그 임무는 2일만에 끝내고 돌아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럴리는 없지만 설마 폭발물은 아니겠지, 멀린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검지와 엄지만으로 상자 뚜껑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달콤한 설탕 냄새가 손가락에 묻어 나왔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우뚱하려는 때였다.
"놀랬잖습니까. 갤러해드."
"미안하군. 자네가 선물을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말이지."
선물? 멀린은 안경을 고쳐 썼다. 갤러해드가 그에게?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그의 생일도 아니었다. 생일 선물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도넛을 받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다.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로군."
"뭐...이런 적이 없잖습니까."
"하면 안 된다는 법도 없지."
해리 하트는 고개를 몇 번 까딱여 그에게 상자를 열어 보기를 종용했다. 그렇게 말한다면, 멀린은 어깨를 으쓱하며 뚜껑를 열었다. 놀랍게도 상자 안에는 겉면보다도 더 화려한 도넛들이 가득 차 있었다. 색색깔의 스프링클과 코코넛 가루, 슈가 파우더를 아낌없이 뿌린 여섯 개의 도넛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위스키가 든 잔을 홀짝이는 해리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상자를 한 번 더 쳐다보았다. 눈을 깜박여도 내용물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잠깐 동안 뺨을 꼬집어 봐야 할 지 고민했다.
"..이건 뭡니까?"
"도넛이지."
"..."
"자네를 위해서 사 온."
할 말을 잃었다. 물론 그는 단 것을 좋아했다. 좋아한다기보다는 좋아할 수 밖에 없다가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밤샘 업무와 사정 봐주지 않고 밀어닥치는 백업 일은 과용량의 카페인과 설탕 없이는 견뎌내기 어려웠다. 먹는 게 아니고 연료로 태워버리는 거지, 멀린은 습관처럼 중얼거리곤 했었다. 삼십 대 까지만 해도 커피는 씁쓸한 맛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위에 휘핑 크림도 듬뿍 얹어 먹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멀린으로서도 이번같은 해리의 선물은 다소..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사 온 선물을 거절하는 것 또한 예의는 아닐 것이다. 멀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초콜릿 격자무늬 장식이 들어간 도넛을 집어들었다. 안에는 커스타드 크림이 가득 들어 있었다.
2. 다섯 번째, 아니 여섯 번째. 록시는 이제 오른손까지도 셈에 포함시켜야 했다. 세지 않았던 것을 포함한다면 아마 양 쪽 발가락도 전부 다 동원해야 할 것이다. 가게 문 닫을 때까지 앞으로 몇 번이나 에그시가 더 한숨을 쉴까, 그녀는 조용히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빈 트레이를 정리했다.
에그시는 아마 저가 한숨을 쉬고 있는 줄도 모를 것이다. 그저 밀대를 들고 멍하니 가게 바깥만 쳐다보고 있었을 뿐이니까. 그는 반짝반짝 윤이 나는 창문을 마른 천으로 닦고 또 닦더니 갑자기 부서진 도넛을 조각조각 잘라서 시식을 하러 나가질 않나, 문에 붙은 포스터가 삐뚤어진 것 같다고 떼고 다시 붙이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바깥으로 나갔다 올 핑계거리가 떨어지자 이제는 바닥 청소를 하다 말고 멍하니 해가 떨어져가는 창 밖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다. 록시는 점점 그녀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저번 주에 번호를 물어보라고 했잖아.”
그는 마치 오븐에 데이기라도 한 듯 화들짝 놀라며 록시를 돌아보았다. 그, 그, 그런거 아냐!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는 귀는 라즈베리 필링 만큼이나 발갛게 익어 있었다.
“그 때 용기를 냈었으면 이번 주말엔 데이트를 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데이트라는 말에 에그시의 얼굴은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더욱 더 빨개졌다. 금방이라도 헬륨 풍선처럼 펑, 하고 터질 것 같아 록산느는 그를 놀리는 것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 와중에도 눈은 혹시나 들었을 까 봐 매장 출입문 쪽을 계속 흘끔거리면서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못 살아.
3. 멀린은 가만히 책상 위에 놓인 상자를 바라보았다. 상자는 항상 똑같았다. 이제는 꼭 보지 않아도 겉면의 무늬를 똑같이 따라 그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해리는 멀린이 별 말 않고 선물을 받아 갔던 그 날부터 계속해서 도넛을 사 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항상 똑같은 가게의, 똑같이 지나치게 달콤한 도넛들이었다.
그는 이미 한 번 넌지시 말을 건넸다. 마음은 알겠지만 더 이상의 간식거리는 괜찮다고. 그렇지만 해리는 그 말을 흘려 들었는지, 아니면 듣지 않은 건지 몇 달이 넘게 매주 금요일마다 똑같은 도넛 가게에 들리는 듯 했다. 금요일마다 특별 세일을 하는 가게인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하지만 멀린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아는 갤러해드는 할인이나 이벤트를 기억하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매주 그걸 기억해서 똑같은 가게에 들린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니면 이 가게의 도넛을 특별히 좋아한다거나. 그러나 해리는 단 것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아주 가끔 먹는 크림 브륄레나 과일 셔벗을 제외한다면, 더군다나 멀린한테도 버거운 양의 도넛을 스스로 먹기 위해 산다고? 근거가 부족한 가설이다.
어쩌면 해리 하트는 도넛을 위해서 그 가게에 들리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머릿속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킹스맨 임무와 관련이 있는 일인가? 그는 커피 머그를 내려놓고 몇 번 패드를 깔짝거렸다. 딱히 짚이는 것이 없다. 가게는 아주 평범했다. 번화가에서 적당히 떨어진 위치에 딱히 수상한 사람도 드나들지 않았고, 중요한 거래가 오가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갤러해드는 무슨 일로 여기를 드나드는 거지? 그는 도로 CCTV 영상을 조금 돌려 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아주 어설프지만 새로운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설마, 에이 설마.
4. 록시와 에그시는 그 남자를 ‘미스터 프라이데이’라고 불렀다. 항상 금요일 점심 께 쯤에 가게에 들렀기 때문이다. 남자가 처음 가게에 오기 시작한 것은 4월 즈음이었다. 세빌 로에서나 볼 법한 깔끔하게 핏이 맞는 정장에 둘은 아마 그 쪽 계통 일을 하는 사람이거나, 혹은 맞춤 수트를 꼭 입어야 하는 종류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추측했다. 어깨에 묻은 꽃잎을 가볍게 털어내더니 그는 6개를 선물용으로 포장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마 애들 주려고 사가는 거 아닐까? 록산느는 무심코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한 추측을 말했다가 난생 처음으로 에그시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사람이 왜 좋은 건데? 록시는 그와 12살 남짓부터 알아 왔지만 그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샴페인으로 가득 찬 수영장에서 헤엄이라도 치다가 나온 듯 에그시는 한동안 정신을 못 차렸다. 그리고 록시가 아는 한 이런 적은 처음이 아니었다.
‘너 첫사랑 때도 그러진 않았잖아.’
‘네가 내 첫사랑을 어떻게 알아?’
‘왜 몰라. 우리 문학 선생님이었잖아.’
에그시는 정말로 그의 비밀스러운 첫사랑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고 여겼던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의 반응에 그렇게 비스듬히 기울인 의자가 넘어갈 정도로 허둥거리지 않았을 테니까. 아니, 그건 그냥 모르는 게 몇 개 있어서 가져가서 물어봤던 거고. 선물은 다른 선생님한테도 다 했었어! 그는 필사적으로 항변했다.
‘하지만 편지는 그 선생님한테만 줬잖아.’
정곡을 찔렀다. 굳이 에그시와 10년 넘게 친구로 지내지 않더라도 그가 속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눈을 달고 있다면 뻔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록산느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중학교 때 문학 선생님, 아마 에그시가 좋아한다는 것을 몰랐더라면 그대로 잊혀졌을 그 선생님은 겨울을 그린 수채화처럼 희마하고 푸슬푸슬했다. 그러고 보니 둘이 조금 닮은 것도 같다. 항상 수트를 입고 다니는 것도.
‘그래도 그 땐 몰래 편지라도 가져다 놓을 정도로 용기가 있었는데.’
이제 내 친구는 마음에 드는 남자한테 번호 하나 못 물어보는 소심증 환자가 되었네, 록시는 과장되게 손을 내저었다. 그녀는 이미 몇 주간 똑같은 고민에 대해 연애 상담을 해 주었고, 에그시에게는 미안하지만 매번 똑같은 답변을 해 주는 데에도 상당히 지쳐 있는 상태였다.
5. 킹스맨 영국 본부는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남미 쪽에서 맡게 되었던 일이 브라질 뿐만 아니라 인접국까지 모두 연계되어 있던 문제였기 때문에 제임스의 복귀는 상당히 늦어지게 되었다. 가차없는 칼날에 찢겨 나갔던 연한 풀색 수트 대신 새 것을 하나 맞춰야 했던 점도 한 몫 했다. 어쨌든 그는 이번에도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고, 그에 감사하고 있었다. 비가 한 번 훑고 지나갔는지 물기 어린 풀밭을 사뿐사뿐 밟으며 그는 본부 건물로 들어섰다. 아마도 특별한 일이 따로 있지 않는 이상, 그는 관련 보고서를 몇 장 제출한 후에 귀가해서 짧지만 달콤한 휴가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계획은 거의 처음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첫째로, 멀린이 그의 쿼터에 있지 않았다. 둘째로, 그는 놀랍게도 자주 오지 않는 응접실에 있었다. 갤러해드와 함께 티 타임이라도 즐기고 있었나? 제임스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멀린의 표정은 여유롭게 오후의 휴식을 즐기는 사람 치고는 꽤나 괴로워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제임스를 보자마자 잘 걸렸다는 듯 이리 오라고 불렀다. 거기에서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많이 먹게.”
“...”
“진심이야.”
티 타임을 위한 간식은 스콘도 간단한 레몬 타르트도 아니었다. 아몬드와 땅콩 버터와 계피, 메이플 시럽이 빼곡히 뿌려진 도넛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15개였다. 단 것 좋아하지? 그 말을 하는 멀린의 표정은 안도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제임스는 차마 거기에다 대고 새로 수트를 맞췄기 때문에 식이 조절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한 개 정도라면 괜찮겠지, 그는 조용히 가장 덜 달아 보이는 것을 집어들었다. 한 입 베어물자 그 때까지 조용히 낮술을 즐기고 있던 갤러해드가 말을 걸었다.
“맛이 어떤가?”
아. 네. 뭐. 좋네요. 제임스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러자 멀린이 옆에서 그를 쏘아보았다. 그는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잘 됐군. 앞으로는 제임스도 같이 먹을 수 있겠어.”
뭘요? 뭐가요? 대화 분위기를 따라가지 못했던 것은 제임스에게 있어서 매우 드문 일이었다. 멀린은 말없이 이마를 짚었고, 그는 혹시 말실수를 한 게 있나 곰곰히 따져보았다. 짚이는 것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