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는 저택 2층에 위치한 서재에서 한참이나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해리 토마스 하트 주니어. 보통 토미라고 불리는 그의 아들이 한참 동안이나 꽃 덤불 옆을 서성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지 꽃덤불 옆을 빙글빙글 돌다가, 꽃을 따 하나하나 꽃잎을 떼어 보기도 하고 다 필요 없다는 듯 등 뒤로 던지는 걸 지켜보기를 약 30분. 해리는 무엇인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로렌스가 심혈을 기울여 가꾼 정원이 전부 뜯겨나갈 기세였기 때문이다.
젊은 하트가 서재로 들어서자 해리는 읽고 있던 신문을 협탁으로 밀어 두었다. 그리고 최대한 상냥하고 이해심 가득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그러나 그의 아들은 왜 불렀냐는 듯 부루퉁한 표정으로 버리는 걸 깜박한 듯 한 꽃송이를 하나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오후에는 어디 나간다고 들은 것 같은데.”
“취소되었어요.”
평소답지 않게 툭툭 던지는 것 같은 말투였다. 해리는 머릿속으로 가능한 경우의 수를 떠올려보려고 애썼다. 테니스 시합? 체스 클럽? 가능성은 낮지만 사교 모임에서 생긴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도 토미를 저렇게 첫 발표회에 나가는 학생처럼 초조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유감이구나. 열심히 준비하던 것 같은데.”
오전 내내 드레스룸을 다 뒤엎으면서 입을 옷이 없다고 하소연을 늘어놓는 걸 들은 것 같은데. 위장이긴 하지만 재단사라는 직업을 가진 아버지를 둔 사람이 할 법한 얘기는 아니었다. 옷이라면 얼마든지 만들어 줄 수 있지만 당장 오늘 오후는 어려울 것이다. 해리는 대신 다른 제안을 하기로 했다.
“네 고민을 위해서는 뭐든 아끼지 않으마. 그게 돈이라면...”
“돈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일도 있어요.”
토미는 그의 제안에 다소 화가 난 듯 했다. 마치 얼토당토않은 제안을 받았다는 마냥 그는 반듯하게 매인 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끌러내렸다. 최소 30분은 그 타이를 잡고 끙끙거렸을 텐데. 해리는 그 모습을 보며 눈을 몇 번 깜박였다.
“그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으마. 하지만 너를 위한 내 노력까지 부인하지는 말거라. 어쨌든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건 꽤 많으니 말이다.”
해리는 노트북 옆에서 찰랑거리는 위스키 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말을 마저 이었다.
“...연애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해리와 그의 아들은 부자지간임을 감안하더라도 상당히 많은 점에서 닮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트 경은 초조해진 듯 입술 안쪽을 깨무는 아들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렇게 단순해서야.
“요즘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아서 너를 불렀는데. 이래서야 너를 위해 준비한 바하마 휴양지도 아무 소용이 없겠구나.”
그는 장난스럽게 네가 원한다면 24시간 이내에 채비를 마쳐 줄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 말에는 어느 정도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아버지 말씀이 전혀 틀린 건 아니에요.”
해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토미는 일생일대의 고민이라도 하는 듯 서재를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미스터 하트 시니어. 아버지와 잘 안 맞기는 했지만, 해리는 항상 그를 이해하려 했다.
“데이트 신청은 해 봤니?”
주책맞은 아들 자랑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토미는 항상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항상 예의바르게 행동했고, 영특했으며 게다가 잘생기기까지 했다.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데이트 상대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만년필처럼 파고드는 질문에 토미는 당황스러운 듯 몇 번 말을 골랐다.
“기회가 많이 없었어요.”
“기회야 만들면 되지. 공원에 산책을 하러 가거나 아니면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가는 것도 좋겠구나. 단골 레스토랑으로 함께 저녁을 먹어도 가도 좋고. 바보같이 이렇게 간단한 걸 기회타령을 하다니.”
“아버지. 그 애는 마치 물레방아를 돌리는 냇물처럼 바빠요. 에그시는 1분 1초마다 다 다른 일을 잡아 놨다구요. 학교 앞 카페, 8번가의 식료품 상점, 저녁부터 새벽까지는 블랙 프린스에서 일해요. 아무리 설득을 하려고 해도 매번 시간이 없다고 해요. 그러니 어떻게 기회를 만들 수 있겠어요?”
“네 언변과 4개쯤 되는 은행 계좌로도 한 두 시간을 살 수 없다니 유감스러운 일이구나.”
해리는 거의 바닥을 드러내는 잔에 새로 위스키를 부었다. 그리고 다른 크리스털 잔 하나를 꺼내어 아들에게 흔들어보였다. 저렇게나 빠르게 말을 한다면, 분명 얼마 가지 않아 지칠 것이기 때문이다.
“어물어물하다 기회를 놓쳐버렸어요...그 애는 모레 정오에 림프스톤으로 가는 기차를 타요. 해병대에 들어갈 거라면서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기차역까지 에그시를 태워주는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단둘이만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겨우 15분 정도에요. 그 15분으로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사랑의 세레나데라도 부를까요? 돈은 절대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요.”
한바탕 즉흥 연설을 끝마친 토마스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해리는 그에게 술 대신 물 잔을 건넸다. 자신과 꼭 닮은 다갈색 눈은 갈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알았다. 여하튼 네 고민을 털어놔 주어서 고맙구나. 이제 산책을 좀 다녀오는 게 어떻겠니? 산책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에게 인사하는 걸 잊지 말거라.”
너에게 생각지도 못한 행운을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일이니. 네가 말한 대로 돈으로는 시간을 살 수 없지. 맞는 말이란다. 하지만 그 시간도 때때로 금광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곤 하는 법이란다. 아버지의 조언은 미처 방문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그날 저녁, 하트 가 뿐만 아니라 사교계의 가십이라면 모르는 게 없는 제임스 외삼촌이 저택을 방문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토미의 고민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나도 오늘 오후에 알았는데, 해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 얘기라면 이미 들었어. 내 예금을 다 써도 상관없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돈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하더군. 그게 된다면 진작 그 카페를 다 사버렸을 거라면서.”
“저런. 돈 얘기는 잘못하셨네요. 이번에는 토미가 맞아요. 진실한 사랑에 재산은 썩 도움이 안 되더라구요. 조금만 더 빨리 얘기를 했으면 좋았을 걸. 그런데 이미 늦었네요.”
제임스 외삼촌은 저택을 떠나기 전 하나뿐인 조카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작은 상자에서 오래된 금반지 하나를 꺼내 토미에게 건네주었다.
“내일 갈 때 이걸 끼고 가 보렴. 원래는 네 어머니가 갖고 있던 건데, 사랑의 행운을 가져다주는 반지라고 했었거든.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으니 행운을 빌어봐야겠지.”
토미는 공손하게 반지를 받아들고 새끼손가락에 끼워보았다. 그러나 반지는 둘째마디까지밖에 들어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는 반지를 주머니에 넣어둬야 했다. 그러고 나서 전화로 내일 점심에 차를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오전 11시 12분, 토미는 로울리 웨이의 입구에 서 있는 에그시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한동안 집을 비우는 사람치고는 꽤 작은 가방을 매고 있었다.
“태워다 준다고 해서 고마워.”
“이 정도로 뭘. 패딩턴 역으로 가 주세요.”
토미는 기사에게 말했다. 그리고 검은 택시는 마이다 베일을 따라 쏜살같이 달렸다. 홀 로드 즈음을 지나던 중 토미는 허겁지겁 기사에게 왔던 길을 돌아가 달라고 부탁했다.
“반지를 떨어뜨린 것 같아요.”
아까 에그시 쪽 문을 열어주다가 떨어뜨린 것 같다며 토미는 양해를 구했다.
“선물로 받은 거라...돌아가자고 해서 정말 미안해. 어디에서 떨어뜨린 건지 짐작 가니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출발지로 다시 돌아오자마자 정말 1분도 채 되지 않아 토미는 아스팔트 사이에서 반지를 찾아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다시 큰 길로 진입하자마자 대형 화물 트럭이 택시를 앞질러 갔다. 기사는 인상 한 번 찡그리지 않고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려고 시도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커다란 가구운반차가 길을 가로막았다. 쉼 없이 달려가는 시계바늘과 다르게 길이 막힌 자동차는 속력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에그시는 시계를 몇 번 보더니 가볍게 손끝을 깨물었다. 런던 같은 대도시에서는 교통이 막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지금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옆길로 빠져나가서 갈 수 있을까?”
에그시는 마치 교통 체증의 끝을 보려는 듯 목을 길게 뻗었다.
“운이 좋다면.”
운전기사는 최대한 침착하게 다른 쪽 도로로 차를 돌리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담쟁이덩굴처럼 도로 위에 자동차가 얼기설기 얽혀 있는 상황에서는 빠르게 대처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각 교차로마다 차량들이 이 밀집지역으로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운전사들끼리 소리치는 고함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런던 시내의 모든 차량이 이 길로 일제히 몰려드는 것 같았다.
“진짜 미안해.”
토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기차 시간 맞추기는 어려울 거 같아. 내 잘못이야. 아까 반지 때문에 차를 돌리지 말았어야 하는데...”
시계 바늘이 12시를 지나가자 에그시는 체념한 듯 했다.
“할 수 없지, 뭐. 다음 기차를 타고 최대한 빨리 가는 수밖에.”
에그시는 가방을 꽉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긴장이 풀린 듯 뒷좌석에 그대로 녹아내렸다.
“그래서, 그 반지 좀 보여줘. 어떤 건지 구경이나 해야지.”
그 다음날 오후, 누군가가 해리의 서재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모래색 가디건 차림으로 기사가 나오는 소설을 읽고 있던 해리가 대답했다. 제임스였다. 그는 백발의 천사처럼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둘이 사귀기로 했대요. 기차역으로 가는 길에 길이 막혀서 몇 시간 동안 꼼짝 못 한 동안에...어제 제가 준 반지 기억나시죠? 그러니까 토미가 그 반지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그걸 주우려고 다시 돌아갔는데, 그 사이에 차가 확 밀렸다는 거예요. 유례없는 교통체증이었다나 봐요. 그 사이에 토미는 사랑을 고백했고, 그 애가 마음을 바꿨대요. 그러니까 진실한 사랑이 결국 행운을 가져다 준 거라구요, 해리.”
“그 애가 바라는 대로 되었다니 기쁘군. 내가 분명히 전에 이 일에 대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겠다고...”
“결국 돈보다는 사랑이 제 역할을 한 거죠!”
제임스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해리는 읽고 있던 책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제임스. 나는 지금 용감한 기사가 진퇴양난에 처해 있는 장을 읽고 있다네. 금방이라도 적이 쫓아올 예정이지. 그러니 부탁이니까, 내가 계속 책을 읽을 수 있게 내버려둔다면 고맙겠군.”
이야기는 여기서 끝을 맺어야 좋을 것이다. 이야기를 읽고 있는 여러분만큼이나 나도 진심으로 그렇게 바란다. 그러나 진실을 찾기 위해서는 때때로 우물 밑바닥까지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다음날, 안경을 끼고 한쪽 손에는 두꺼운 서류뭉치를 든 멀린이라는 사람이 하트 저택을 찾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더 잘 풀린 것 같군.”
해리는 오랜 친구에게 설탕을 5개 넣은 홍차를 권했다. 멀린은 그 찻잔을 마다하지 않았다.
“다음부터는 킹스맨 지위를 사적으로 이용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요. 자동차 네비게이션 네트워크, 교통방송, 그것도 모자라 ‘혹시 모른다’는 이유로 철도 스케쥴까지요. 미스터 록월이 절대 안 된다는 걸 사정사정해서 뒤바꿔놔야 했다고요. 이번 일을 덮으려면 한두 푼으로는 안 될 겁니다, 갤러해드. 제가 당신 전화 받고 얼마나 진땀 뺐는지는 알고 계십니까?”
“항상 자네에게 감사하고 있다네.”
해리는 자신의 찻잔에도 뜨거운 물을 따랐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항의와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창밖으로 나부끼는 봄날씨는 정말 맑았다. 이렇게 좋은 날에는 역시 데이트가 제격이겠지. 옅게 우려진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며 해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멀린이 떠나기 전, 바하마로 갈 비행기를 하나 준비해 달라고 부탁해야겠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