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쩜오 온리에 나오는 젊해리에그시 2차 소설본 <miracle worker>입니다
예쁜 표지 만들어주신 라핀(@lapin_ami)님 감사합니다!
◆ A5 / 떡제본 / 65p± / R19 / 6000원
젊해리와 에그시가 동거하다가 결혼하고 연애도 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5개 에피소드와 외전 1편 구성입니다.
실제 출력되는 내용과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유통기한이 거의 끝나가는 치즈와 두 모금 정도밖에 남지 않은 오렌지주스, 그리고 말라비틀어진 식빵 2조각. 에그시는 몇 번 하품을 하고 냉장고를 닫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슈퍼마켓에 다녀와야 할 것 같다. 신작 게임 타이틀을 플레이하는 동안은 아마 갔다 올 시간이 없을 거니까. 오랜만에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사다 채워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건강하게 살려면 비타민이 중요하니까. 그러려면 일단…에그시는 하얀 방문을 열고 바닥에 널브러진 이불 더미를 걷어찼다. 야, 일어나.
“벌써 12시 반이야. 점심 안 먹어?”
사실 거짓말이다. 아직 12시도 지나지 않았다. 점심이라는 말에 잠이 깬 듯 중국식 만두처럼 둥그렇게 부푼 이불이 몇 번 꿈틀거렸다. 문제는 일어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거다.
“일어나라니까.”
허리를 굽히기 귀찮아 몇 번 더 이불을 툭툭 차자 길쭉한 한쪽 발이 이불 밖으로 빼꼼히 튀어나왔다. 그러다가 다시 쏙 들어갔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결국 에그시는 똑같이 침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야 했다. 7년간의 우정과 4년째의 동거를 통해 에그시는 그의 동거인이 간지럼 태우기에 매우 약하다는 사실과, 어디를 간지럽혀야 해리 하트가 가장 재빠르게 일어나는지 터득할 수 있었다. 가장 약한 부분은 역시…불쑥 손을 집어넣어 예쁘게 오밀조밀 잡힌 배 근육과 갈비뼈 사이를 건드리자 이불 속에서 으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 맛 좀 봐라. 그리고 에그시는 데이지 머리를 감기는 것처럼 거침없이 손가락을 놀렸다. 살려달라는 비명이 옅은 하늘색 이불 사이에서 새어나왔다. 그러나 에그시는 손을 늦추지 않았다. 안 그러면 깨워놓은 것도 말짱 도루묵, 소파로 비틀비틀 낮잠을 자러 갈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참에 잠을 확 깨워야지. 쇼핑에 데려가겠다는 본 목적은 이미 이불 속에 든 해리와 함께 엎치락뒤치락하는 바람에 까먹은 지 오래였다. 마침내 해리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알았어. 일어날게.”
세상은 어쩜 이렇게 불공평한지. 아침부터 일어나 깨끗이 감고 단정하게 빗질까지 한 제 머리보다 방금 일어나 부스스한 곱슬머리가 더 세련되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건 정말 불공평하다. 똑같은 술을 마셨는데도 불구하고 붓기 하나 없는 얼굴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일어났으니 간질이지 말라고 하면서도 해리의 눈은 아직 잠에 취한 듯 탁한 홍차 빛이었다. 정신 차리라는 뜻에서 에그시는 얄미운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우리 마트 가야 해.”
“마트?”
“먹을 게 똑 떨어졌어. 네가 좋아하는 기네스 맥주도 없어.”
하나도 없어? 한 캔도? 그 말에 해리 하트는 억지로 눈을 뜨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이 기특해 에그시는 몇 초를 더 기다려 주었다.
“저번에 한 박스 산 거 아냐?”
“어제 다 마셨지.”
아. 해리는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그리고 둘둘 말린 이불에서 꿈틀거리며 빠져나왔다. 어젯밤 꿈속에서 무슨 마라톤이라도 뛰었는지, 평소에 입고 자는 크랜베리색 가운과 잠옷 상의는 의자 등받이 위에 걸려 있었다. 따라서 해리가 걸치고 있는 천이라고는 얕게 줄무늬가 들어간 잠옷 바지가 전부였다. 그리고 해리 하트는 에그시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이유 몇 가지를 들어 잘 때는 속옷을 입지 않았다. 갑자기 그 생각이 나자 에그시는 얼른 씻으라고 소리친 후 황급히 거실로 나갔다. 절대 부끄러워서 그런 건 아니다. 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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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과가 괜찮아 보이는데. 과일 코너에 선 에그시는 고민에 빠졌다. 맛있어 보이긴 하는데 둘이서 6개 다 먹을 수 있을까. 아침마다 1개씩 먹으면 딱 맞겠지만, 괜히 남으면 처치곤란이잖아. 봉투를 들었다가, 고개를 저으면서 다시 내려놓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누가 보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 모르겠다. 남으면 스프레드로 만들어버리지 뭐. 결국 에그시는 가장 매끈하고 잘 익은 사과 한 봉지를 집어 들었다. 타이밍 좋게 해리가 저 멀리에서 카트를 밀고 왔다.
“뭐 사야 해?”
“다. 집에 아무것도 없어.”
감자도 맛있어 보이고. 에그시는 진열대에 놓인 감자를 몇 개 집어 들었다. 삶아서 으깬 다음에 남아있는 치즈와 양파를 넣으면 좋을 것 같다. 그럼 옥수수 캔도 하나 사 가야지. 한 통 만들어 둔 다음에 살라미 햄이랑 같이 샌드위치를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렇게 이것저것 집어 들다 보니 어느새 쇼핑 카트는 식재료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정도면 당분간 문제없겠지. 에그시는 수확을 마친 농부처럼 뿌듯하게 웃었다.
해리가 우유 유통기한을 살피느라 한눈을 판 사이, 아이스크림 코너가 에그시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초콜릿 퍼지, 피넛 버터 컵, 그리고 블루베리 치즈케이크. 알록달록한 통에 담긴 아이스크림은 <특가 세일: 3개에 10파운드>라는 글귀로 에그시를 유혹하고 있었다. 그리고 해리는 누구보다도 그걸 빠르게 알아챘다.
“안 돼. 그 많은 걸 언제 다 먹어.”
해리 하트는 아이스크림을 거의 먹지 않는다. 반면 에그시는 아이스크림이라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었다.
“3개 사면 원래 가격보다 2파운드나 이득이잖아. 제발.”
한 통으로도 충분해. 열심히 손가락을 접어가며 계산했는데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에그시는 해리를 설득하지 못했고, 품에 안고 있던 민트 초코칩을 도로 내려놔야 했다. 냉동고의 문을 닫은 후에도 미련이 뚝 뚝 떨어지는 눈으로 아이스크림을 쳐다보자 결국 해리는 한숨을 푹 쉬었다.
“캐드버리 초콜릿 사줄게.”
“2개.”
“그래.”
둘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대부분 이렇게 끝나곤 했다. 너 마음 변하기 전에 얼른 가져와서 카트에 넣어야겠다고 과자 코너로 달려가는 에그시를 바라보며 해리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에그시가 들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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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와 같이 살아서 좋은 점 중 하나는 주말마다 맛있는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해리 하트는 까다롭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동거를 시작하고 약 2달간은 식사 때마다 전쟁이었다. 아침부터 일어나 스크램블 에그를 만들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계란이 너무 익은 것 같아’ 라니. 그럼 네가 만들던가! 처음에는 한바탕 짜증을 냈는데, 긍정적인 면을 본다면 좋은 점도 있었다. 일단 프라이팬을 잡은 해리의 요리 솜씨는 에그시보다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가. 같이 살기 시작한 후로 살이 찐 것 같다. 에그시는 의식적으로 샐러리를 먹으려 애쓰며 아랫배를 흘깃 내려다보았다. 진짜로 살이 찐 건지, 아니면 지나치게 맛있는 오늘의 저녁 식사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요새 운동을 안 해서 그런가? 살이 잘 찌지 않는 체질인 해리와 달리 에그시는 꾸준한 운동과 식단관리가 필수적이었다. 체조할 때만큼 엄격하게 조절하는 건 아니지만…갑자기 불안감이 스멀스멀 종아리를 타고 올랐다. 하지만 플레이트에 놓인 고기와 감자들은 얼른 먹지 않고 뭘 하냐며 끊임없이 재촉하고 있었다. 포슬포슬하게 잘 익은 감자를 먹으며 에그시는 다짐했다. 내일은 진짜 운동해야지. 저번 주에도 이렇게 마음먹었던 건 이미 까맣게 잊어버렸다.
하루 종일 별로 한 일도 없는 것 같은데, 벌써 2월 24일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휴일이 이렇게 빨리 지나가다니 믿을 수 없어. 소파에 비스듬히 늘어져 있는 에그시에게 해리는 짧게 흠 소리를 내는 것으로 동의를 표시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밀린 빨래하고, 텅 빈 냉장고 다시 채우고 저녁 먹고 씻으니까 하루가 다 가버렸다. 이렇게 일요일을 허무하게 보낼 순 없는데. 저번에 하다 만 게임이나 다시 깰까, 필사적으로 발가락을 뻗어 컨트롤러를 쥐려고 애쓰는 에그시에게 해리가 불쑥 말을 걸었다.
“우리 영화 볼래?”
음악도 음악이지만, 둘의 영화 취향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영화 한 편 고를 때마다 해리와 에그시는 지나치게 시끄럽고 폭발만 하니까 머리가 아프다. 너무 단조로워서 재미가 없다. 내가 그 감독 작품 싫어하는 거 알잖아. 난 프랑스 영화는 싫어. 하면서 한참을 싸우곤 했다.
그런 둘에게 옛날 007시리즈는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둘은 어떤 영화를 볼지에 대해 밤새도록 갑론을박을 벌였을 것이다. 요새 액션 영화에 대해 대체로 혹평을 늘어놓는 해리도 옛날 007 시리즈에 대해서는 군말이 없었다. 숀 코너리가 우리를 구원하리라. 에그시는 이미 몇 번이나 봐서 대사를 다 외울 것 같은 영화를 재생했다.
왜 제임스 본드는 아무에게나 자기 이름을 알려주는 걸까. 그리고 왜 저 사람은 호텔방에 멋대로 들어온 남자에게 자기 이름을 알려주는 걸까. 우리 엄마라면 분명히 영화 보면서 한소리 했을거다. 에그시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나초를 몇 개 집어먹었다. 근데 생각해 보니까 저만큼 잘생긴 남자라면, 왠지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갈 수 있을 같았다. 에그시 또한 얼굴에 정신 팔렸던 경험이 몇 번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그시의 정신을 홀랑 가져갔던 사람은 지금 졸린 듯 눈을 깜박이며 TV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노르스름한 불빛이 섬세하게 조각된 이마와 코에 옅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영화 대사를 따라 외기라도 하는지 살짝 벌린 담홍색 입술, 그리고 알코올 때문에 살짝 상기된 뺨은 에그시 이외에도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하기에 전혀 부족함 없는 미모였다.
잘생겼다. 살짝 젖어 가라앉은 다갈색 곱슬머리와 자신감 넘치는 눈썹, 뱃머리처럼 오똑한 코와 웃을 때 정말 예쁘게 휘어지는 입 꼬리까지 전부 다. 해리 하트는 정말 잘생겼다. 그것도 에그시 취향으로 잘 생긴 얼굴이었다. 꼭 버터 머핀처럼 곱고 부드러워 보여서, 한 입 베어 물어보고 싶었다. 새삼 대학교 때 해리를 좋다고 따라다니던 애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